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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복지정책

영국의 사회보장 제도 역사 1

by 꿈섬 2023. 2.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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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엘리자베스 구빈법

 

영국에서 빈민이 최초로 나타나게 된 것은 16세기 초이다. 16세기 절정을 이룬 유랑인들의 증가는 수세기 동안 안정을 유지해 온 봉건적 질서의 파괴를 의미하는 것이다.

 

14세기 전 유럽을 휩쓴 흑사병으로 인구는 급격히 감소하였고, 수많은 유랑인들을 발생되어 봉건사회의 뿌리가 흔들리게 된다. 그 결과 농촌의 노동력이 부족하게 되고 이는 경작지를 목유지로 전환하는 엔클로저운동을 시작되었다. 또한 신대륙에서의 양모에 대한 수요급등으로 많은 농노들을 유랑민으로 전락하게된다. 15세기부터 19세기 초까지 진행된 엔클로저운동은 대규모 유랑민들을 발생시켜 왔다. 또한 장미전쟁을 선두로 프랑스와의 계속된 전쟁 등 지속적인 사회적 격변들은 실업병사들을 양산해내고 유랑민들의 증가와 그로인한 봉건사회의 붕괴를 재촉하였다.

 

영국 튜더왕가에서 실시한 일련의 구빈정책들은 이와 같이 급격한 봉건사회의 붕괴가 초래하는 사회적 무질서에 대한 공포로부터 비롯되었다. 튜더 왕가 구빈정책을 집대성한 1601년 엘리자베스 구빈법은 이미 14세기부터 나타난 빈민에 대한 제반 법령을 체계화시킨 것이다.

 

영국에서 최초의 구빈법적 통제는 1349년 제정된 노동자조례로 나타났는데, 이 법령은 당시 흑사병과 흉작으로 인한 인구감소와 유랑민들의 증가에 따른 봉건사회의 붕괴를 방지하기 위한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노동자조례를 비롯한 일련의 후속 입법들은 봉건사회의 붕괴를 초래하는 무질서에 대해 가혹한 처벌을 가하는 내용들을 담고 있다. '억압을 통한 구제'가 구빈법 체제의 핵심이라고할 수 있다.

법망치

1349년 노동자조례는 유민과 걸인 등 빈민들의 지리적 이동을 금지시키고, 자신의 교구를 벗어나는 사람들은 가혹한 체벌을 가하였다. 또한 생계수단이 없는 건강한 성인은 그들의 노동력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있을 경우 반드시 일을 해야 했으며, 건장한 빈민에게 자선을 행하는 사람은 처벌받았다.

 

1388년 제정된 구빈법은 구걸행위에 대해 면허제를 실시하였다. 빈민들은 이주의 자유를 제한 받아 타 지역으로 이주하거나 여행을 갈 경우 이동허가증을 발부받아야 했다. 그렇지 못한 빈민이 나타났을 경우 범죄자로 취급되었다. 근로능력이 없는 빈자에 대한 구호만이 허용되는 시기였다.

같은 해에 제정된 직인조례는 길드 등의 노동조직에서 노동의 강제, 7년간의 도제 봉사, 그리고 관리에 의한 연례적 임금 사정 등을 규정하였다.

 

엘리자베스 구빈법에서 체계화된 구빈행정의 특징은 다음과 같이 정리될 수 있다.

 

첫째, 빈민들을 특성에 따라 집단화하고 차별적으로 대처하는 구빈행정의 원칙을 확립하였다. 엘리자베스 구빈법은 빈민을 세 집단으로 분류하였다.

근로능력이 있는 건장한 빈민으로 이들은 구제할 가치가 없다고 판단되어 작업장으로 보내졌으며, 극소한의 구호가 허용되었다.

근로능력이 없는 무능력한 빈민으로 이들은 구제할 가치가 있는 빈민으로 분류되어 구빈원에 수용되어 보호를 받았다.

빈민아동들로 이들은 도제수습의 기회를 제공하거나 고아원에 수용 보호되었다. 만약 근로능력이 있는 건장한 빈민이 작업장에 입소하는 것을 거부할 경우 그들은 교정원에 보내져서 범죄자와 같은 처벌을 받았다.

이와 같은 빈민들에 대한 구분 및 차별적 대우는 이미 14세기 입법들에서부터 나타난 특성이지만 제반 입법들에 산재되어 있었고, 그 대처 방식 역시 지방에 따라 많은 차이를 나타냈으며 대개 빈민들이 구별되지

못한 채 구빈원에 함께 수용되곤 하였다.

엘리자베스 구빈법은 기존의 원칙들을 통일적으로 체계화하였다.

 

둘째, 엘리자베스 구빈법은 구빈행정체계에 있어 전국적 통일성을 기하였다. 이전까지 추밀원, 치안판사, 빈민감독관 등의 역할이 혼돈되었으나, 엘리자베스 구빈법은 추밀원을 정점으로 하여, 교구를 말단의 행정단위로 삼아 각 지방의 치안판사들이 교구민 중 선발된 2-~4명의 빈민감독관에게 구빈행정의 책임을 맡겼다. 빈민감독관은 구빈행정의 집행뿐 아니라 적절한 시기에 구빈세를 교구민들에게 부과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받았다.

 

영국 구빈법의 역사가 처벌위주의 가혹의 역사로 기록되었던 이유는 당시 빈곤문제가 사회적 인식이 전무했기때문이다. 14세기 엔클로저와 흑사병의 엄습으로 촉발된 유랑민들의 증가는 16세기 이후 영국이 자본주의의 원시적 축적을 겪으면서 더욱 격화된다. 이 당시 영국은 빠른 속도로 해외무역의 증가와 도시산업 부문의 증가를 나타냈는데, 이러한 산업의 발달과 함께 유랑민들 역시 급속도로 증가하였다. 그러나 폴라니가 지적하는 것처럼 당시 사람들은 일견 모순되게 보이는 두 현상 사이의 관계를 명확히 알기에는 사회적 인식이 진전되지 못하였다. 맑스가 지적한 바와 같이 자본주의적 산업의 발전은 상대적 과잉인구 내지 산업예비군의 누적적 증가를 동반한다. 따라서 경기팽창기에는 일견 고용부문으로 흡수되어 있는 것 같은 노동력들이 경기하강기가 되면 급속하게 실업자, 즉 당시의 눈으로 볼 때 유랑민으로 전락되며, 이는 산업의 규모가 크면 클수록 고용층과 상대적 과잉인구 사이를 넘나드는 사람들을 비례적으로 증가시킨다. 그러나 폴라니의 지적처럼 전혀 연관성이 없어 보이는 무역 내지 산업의 발달과 유랑민의 증가라는 두 현상간의 관계를 그 당시 사람들이 명확히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었다. 대신 그들이 파악한 빈곤 증가의 원인은 주로 빈민들의 나태로 나타났다.

 

빈민들은 미숙하고 무지하며 격렬한 행동을 하고, 무엇보다 게으르기 때문에 모든 악의 근원으로 간주되었다. 나태는 어떠한 방법을 사용하더라도 반드시 추방되어야만 했다. 왜냐하면 그것은 노동자와 국가 모두에게 손해를 끼치기 때문이다. 일부 학자들은 나태가 가져오는 이중의 손실을 지적하였다. 먼저 직접적으로 생산을 방해하며, 간접적으로는 부담을 증가시키고, 또한 구걸이 가져오는 비도덕적 결과에 따른 손해를 지적하였다. 이는 구빈법 시대를 지배했던 중상주의자들의 인식이었다. 따라서 구빈법은 결코 자선을 실천적 목표로 상정하지 않았다. 영국, 프랑스는 물론 여타 유럽국가들도 정부의 빈민에 대한 관심은 고통을 감소시킬 목적보다는 법과 질서의 유지라는 목적에서 이루어졌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사회적 무질서에 대한 공포였다.

 

2023.02.23 - [사회보장론] - 사회보장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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